80일 간의 세계일주<쥘 베른>"탄탄한 노력이 수작을 만듭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쥘 베른)"탄탄한 노력이 수작을 만듭니다."

과학과 문학과의 경계, 그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작가가 탄탄한 조사로 쌓아올린 내용을 밑바탕으로 써내려간 재미있는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미건조해보이는 영국의 신사가, 세상이 좁다는 이야기를 꺼내서 세계일주를 80일 안에 할 수 있다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의 처음이 시작된다. 여행 중간 중간 방해요소들이 여럿 등장하고, 여행의 성공여부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와서 소설의 끝머리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그 시대에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용한 여러가지 방법들이다. 현지를 조사하지 않고서는 알아낼 수 없을 듯한 요소들이 여럿 등장하여 주인공을 돕거나 방해한다.

또한 정형화된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소설 내에서 부여받은 역할은 역설적이게도 본연의 목적과는 반대의 것들이 되기 일쑤여서, 표면은 고요하지만 우왕좌왕하는 캐릭터들의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에 관한 설명들이 소설의 중간중간에 나와서 캐릭터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는데, 한국에 태어나 살아서인지 다르게 비추어져서 눈에 어설프게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지금이야 과학이 많이 발전해서 80일보다 더 빠르게 세계일주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80일 만에 세계일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었을까! 그가 신문에 나온 가설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이야기 속에 녹여내기 위해 사용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탄탄한 조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서재에서 11시까지 원고를 쓰고 수정하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서재로 돌아와 열 다섯종의 신문을 읽고, 여러 잡지, 과학 협회와 지리 협회의 정기 간행물을 읽으며 필요한 정보를 수첩에 적는다. 이와 함께 자크 아라고(Jacques Arago)를 비롯한 여러 모험가의 글과 백과사전, 과학자와 지리학자와 교유하면 나눈 대화 등 작품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간추린 노트만 해도 2만 권이 넘었다.(-열린책들 "80일간의 세계일주" 역자 해설 중)"

내가 감동했던 부분은, 바로 그 '노력'부분이었다. 그가 소설을 쓰려고 2만권의 노트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작품을 쓰려고 수집한 내용의 방대함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 주체할 수 없이 쌓아올려진 허영의 잔존하는 찌꺼기들을 몰아낼 길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내가 작품을 쓰려면 재능이 필요하지만, 내게는 그 재능이 없는 기분이 들어서 늘 우울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자료와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문제는 재쳐두고, 매번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짓말을 했다. 내게는 재능이 있으며, 언젠가는 그 재능이 빛을 발할 것이다 라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늘상 느꼈다. 나는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글들만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마다 나는 감히 내가 어깨를 견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무시하고 깍아내렸다. 그러고 나니 내 존재가치도 덩달아 무가치해졌다.

그들이 나라는 개체에게 무가치하든, 인정받지 못하든, 나라는 존재개체에게 영향을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개체는 '나'밖에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훌륭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내 자신을 기만해도 그를 뛰어넘기는 커녕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쥘 베른도, 2만권의 노트를 생산해내며 글을 써냈는데, 나는 어느정도까지 노력을 했던 가.

내가 할 일은 이래도 저래도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짬짬이 글을 쓰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라는 개체에게는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닌가! 훌륭한 작품들을 가슴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 아닌가! 그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그가 그 작품을 쓰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던가. 위대한 작가들의 훌륭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에 심취해서 가슴벅차할 수 있어서, 삭막한 '나'의 세계를 견디고, 버텨온 것을.

그를 깨닫게 해줘서, 또한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서 어린 시절을 꿈으로 넘치는 나날로 보내게 해주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진기한 여행에 몰입하게 해줘서 나는 쥘 베른에게 감사한다.

글의 초반에, 과학과 문학과의 경계가 어느정도 일지 질문했었다. 나는 과학을 믿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것도 믿는다. 과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완벽성을 추구함에도 불확실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불확실한 것들을 다루지만, 인간을 가장 닮았기 때문에 때때로 객관적일 수 있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 '양면성의 총체'라는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중용에 가장 가까운 개체가 예술이라고 나는 믿기에, 예술을 사랑한다. 

아마. 앞으로도.

-完-

가면의 생<로맹가리;에밀 아자르> - "생과 사 앞에 놓인 인간의 상실감"

가면의 생 - (로맹가리;에밀 아자르) 생과 사 앞에 놓인 인간의 상실감

좋게 봐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책 소개에 "이 작품은 로맹 가리가 40년동안 고민하고 고친 소설입니다."라고 나와 있지만, 이건 괴테가 평생동안 써왔다는 "파우스트"와는 비견될 수 없다. 작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직업과는 다르게 마치 일기를 소설인 양 출판해놓은 책이다. 지나치게 솔직한 점이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글을 출판하는 것이 작가라면, 그는 적어도 창조자로서의, 예술 자체로 평가받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마저 던져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작가의 '일기'수준의 이 작품이 읽는 이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이 책이 예술성이 의심된다고 해도, 내가 이 책을 읽고 7일간을 넋나간 상태로 지내게 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시종일관 연민과 괴로움, 안타까움으로 감정을 허덕였다. 그는 소설 내에서 시종일관 고백한다. '나는 평생동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작품만이 남는다. 내가 가면을 쓰든 몸부림을 치든 정신병자가 되든, 아무런 흔적도 되지 않는다.'

그의 처절한 고백은, 결국 제목이 말해주듯 자신조차 뒤집어버린다.

고백하건데, 로맹가리의 생에 대해 약간이라도 찾아보기 전에는 왜 그가 이런 글을 썼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맹가리는 '가면의 생'에서 지저분하리 만치 적나라한 인물을 그리지만, 그걸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의 생'의 작가가 에밀 아자르이기 때문인 줄 알았다. 가명을 내세워 최소한의 자신을 가렸기 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는 쓸 수 있었던 줄로 알았다.. 고로, 그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전적으로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천재가 되고 싶었던 평범한(?)사람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 줄 알았다.

하지만 콩쿠르 상에 대해 찾다가 우연히 그의 생에 대해 읽게 되었는데, 그가 그러한 소설을 썼을 만한 다른 이유를 찾게 되었다.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가 쓴 작품들도 모두 로맹가리 자신의 작품인데도, 에밀 아자르가 쓴 작품을 더 높게 쳐주는 평론가들의 행태에 질려버린 로맹가리의 조롱을 담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절실하게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만, 그 몸부림에 화답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기심과, 공허한 적막 뿐이었기에 그의 마지막이 권총자살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재능을 갖는 것이 인간에게 축복일까 해일까 판단하는 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철없게도 '재능의 존재가치'를 믿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내게도 있을 지 없을지는 그 자신조차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로 인해 허영의 욕조 안에 잠겨 제 자신이 질식하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다. 거품을 걷어내면, 오로지 생명의 본질적인 욕구만이 남는다.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것도,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것도, 모두 인간이 가지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욕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는 종교가, 예술가에게는 그가 만들었는지, 시대가 그에게 잉태를 강요하였는 지, 모를 창조품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가면의 생'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로맹가리의 작품에 반해서 그의 생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 작품을 권하고 싶다. 그 이외의 용도로는, 껍데기뿐인 소설이라 추천하지 않는다.

P.S.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다. 그에 대해 느낀 내 생각이지, 이건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니 이 한 편의 단상은, 곧 내 감정이라 말하는 게 더 합당하다.

또한 이 글은 그의 다른 작품과는 전혀 관련없는, 전적으로 이 작품만을 향한 글이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호평을 받기도 했다.

로맹가리는 한 생애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프랑스의 권위적인 상인 콩쿠르 상(The Prix Goncourt)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다. 그가 상을 두 번 탈 수 있었던 이유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쓴 작품들이 각기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과, 그의 이름으로 탄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이 콩쿠르 상을 받은 작품들이다.

어쩌면 그는 작품에서도 그러했듯, 그의 삶을 통해서도 세상을 향한 조롱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번 글을 쓰며 사람의 생과, 작품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수 많은 수수깨끼와 이유들로 가려져 있어서, 어지간한 조사로 '분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수많은 조사가 있다 해도, 그 전체의 그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비추어 남을 아는 방법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생명을 숨쉬게도 했지만, 자기 파괴로 이끌기도 했던, 극대화 된 나르시즘의 말로...가 이 소설이라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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