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생<로맹가리;에밀 아자르> - "생과 사 앞에 놓인 인간의 상실감"

가면의 생 - (로맹가리;에밀 아자르) 생과 사 앞에 놓인 인간의 상실감

좋게 봐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책 소개에 "이 작품은 로맹 가리가 40년동안 고민하고 고친 소설입니다."라고 나와 있지만, 이건 괴테가 평생동안 써왔다는 "파우스트"와는 비견될 수 없다. 작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직업과는 다르게 마치 일기를 소설인 양 출판해놓은 책이다. 지나치게 솔직한 점이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글을 출판하는 것이 작가라면, 그는 적어도 창조자로서의, 예술 자체로 평가받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마저 던져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작가의 '일기'수준의 이 작품이 읽는 이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이 책이 예술성이 의심된다고 해도, 내가 이 책을 읽고 7일간을 넋나간 상태로 지내게 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시종일관 연민과 괴로움, 안타까움으로 감정을 허덕였다. 그는 소설 내에서 시종일관 고백한다. '나는 평생동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작품만이 남는다. 내가 가면을 쓰든 몸부림을 치든 정신병자가 되든, 아무런 흔적도 되지 않는다.'

그의 처절한 고백은, 결국 제목이 말해주듯 자신조차 뒤집어버린다.

고백하건데, 로맹가리의 생에 대해 약간이라도 찾아보기 전에는 왜 그가 이런 글을 썼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맹가리는 '가면의 생'에서 지저분하리 만치 적나라한 인물을 그리지만, 그걸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의 생'의 작가가 에밀 아자르이기 때문인 줄 알았다. 가명을 내세워 최소한의 자신을 가렸기 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는 쓸 수 있었던 줄로 알았다.. 고로, 그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전적으로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천재가 되고 싶었던 평범한(?)사람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 줄 알았다.

하지만 콩쿠르 상에 대해 찾다가 우연히 그의 생에 대해 읽게 되었는데, 그가 그러한 소설을 썼을 만한 다른 이유를 찾게 되었다.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가 쓴 작품들도 모두 로맹가리 자신의 작품인데도, 에밀 아자르가 쓴 작품을 더 높게 쳐주는 평론가들의 행태에 질려버린 로맹가리의 조롱을 담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절실하게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만, 그 몸부림에 화답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기심과, 공허한 적막 뿐이었기에 그의 마지막이 권총자살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재능을 갖는 것이 인간에게 축복일까 해일까 판단하는 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철없게도 '재능의 존재가치'를 믿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내게도 있을 지 없을지는 그 자신조차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로 인해 허영의 욕조 안에 잠겨 제 자신이 질식하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다. 거품을 걷어내면, 오로지 생명의 본질적인 욕구만이 남는다.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것도,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것도, 모두 인간이 가지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욕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는 종교가, 예술가에게는 그가 만들었는지, 시대가 그에게 잉태를 강요하였는 지, 모를 창조품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가면의 생'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로맹가리의 작품에 반해서 그의 생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 작품을 권하고 싶다. 그 이외의 용도로는, 껍데기뿐인 소설이라 추천하지 않는다.

P.S.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다. 그에 대해 느낀 내 생각이지, 이건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니 이 한 편의 단상은, 곧 내 감정이라 말하는 게 더 합당하다.

또한 이 글은 그의 다른 작품과는 전혀 관련없는, 전적으로 이 작품만을 향한 글이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호평을 받기도 했다.

로맹가리는 한 생애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프랑스의 권위적인 상인 콩쿠르 상(The Prix Goncourt)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다. 그가 상을 두 번 탈 수 있었던 이유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쓴 작품들이 각기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과, 그의 이름으로 탄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이 콩쿠르 상을 받은 작품들이다.

어쩌면 그는 작품에서도 그러했듯, 그의 삶을 통해서도 세상을 향한 조롱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번 글을 쓰며 사람의 생과, 작품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수 많은 수수깨끼와 이유들로 가려져 있어서, 어지간한 조사로 '분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수많은 조사가 있다 해도, 그 전체의 그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비추어 남을 아는 방법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생명을 숨쉬게도 했지만, 자기 파괴로 이끌기도 했던, 극대화 된 나르시즘의 말로...가 이 소설이라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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